월간 퍼블릭아트 2024년 7월호
아티스트
이미지가 서술하지 않는 것, 표면을 향하는 회화
문현정 (독립 큐레이터)
이진형은 시각 기반 매체에서 수집한 이미지로 화면을 재구성하는 회화를 선보여왔다. 그는 자신의 눈을 통해 발견한 시각적 형상을 토대로, 그것의 본래적 의미와 맥락을 소거하고 단번에 알아차릴 수 없는 형태로 구성해 내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선택하는 이미지는 대상의 맥락에서부터 멀어진 채로 회화적 화면을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재료이자 요소로 자리한다. 그렇기에 그의 이미지는 구체적인 형상을 지시하지 않으며, 대상의 분위기와 질감, 윤곽과 같은 조형 요소만 남은 표면을 가시화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현실과 유리되어 원본을 구분하기 힘든 이미지는 회화적 표면에서 붓질을 통한 연속적 변형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다.
그의 작품은 원본으로부터 이탈한 회화를 향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해지는 것은 ‘이미지'이다. 작가는 그의 작업이 ‘수집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수집된 이미지는 어떠한 대상을 촬영한 사진이나 디지털 스크린을 경유한 것, 포토샵과 같은 툴로 편집된 것처럼 보이는 상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작업의 과정에 이미지는 그 맥락을 소거해 내기 위한 여러 단계, 이를테면 선택과 편집, 회화적인 재구성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언어를 전제로 한 이미지의 독해에 대한 오랜 역사를 배제하는 것으로, 어떠한 상에 대한 수사학적 형상이나 상징을 읽어냈어야 했던 과거의 회화적 문법을 거스르고 있다. 이는 이미지를 의미 있는 단위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회화의 표면에 귀속되는 요소로 회귀시키기 위한 작가만의 방법론이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원본을 참조하되, 원본을 재현하기보다는 이를 재구성해 내기 위한 회화의 표면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상이 자리를 잡는 과정은 이미지가 머무는 가장 바깥의 표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회화적 기법과 물성을 통한 매끈한 질감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두 가지의 흥미로운 지점이 발생한다. 하나는 그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사진을 바탕에 둔 전후 미술의 맥락을 역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각각의 이미지를 관계 맺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작품이 위치한 공간을 개입시킨다는 것이다.
그가 사진을 바탕에 둔 회화를 전개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럼에도 이전부터 그의 작업에는 사진적 재현의 대상이 꾸준히 등장해왔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사진적 이미지는 재현과 시뮬라크르의 맥락 안에서 전개되었던 ‘지시성’을 거부하고, 오히려 투사적 맥락이 사라진 대상으로써 표면에 안착한다. 작가는 이미지로부터 의미를 단절해 내기 위한 방법으로써 사진의 클로즈업이나 크롭과 같은, 마치 기술로 편집된 것처럼 보이는 화면을 활용한다. 이러한 조작은 본래의 이미지가 발화하던 대상의 성질을 거부하고, 표면 위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부상시키는 방식으로 적용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대상에서부터 그것이 상징하던 바를 떨어뜨려내며, 성질만이 남게 된 이미지를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다.
이미지는 여러 조작을 경유하여 원본의 대상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순간에 도달한다. 이를 위한 전술은 그의 회화 위에서도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전시장이라는 공간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단계에서 여러 이미지를 나열해놓고 — 그것의 내용을 뒤로하고 — 공간과 조응하는 형상을 선택한다. 이에 따라 이미지는 연속적 회화의 프레임을 통해 구성되기도 하지만 단절되고 파편화된 채로 공간에 병치되기도 한다. 단독으로 놓이거나 서로 다른 화면을 보충하기도, 전시 공간을 연장해 내기도 하는 설치의 구성은 이미지가 본래 규정되었던 맥락을 벗어나 각각의 파편을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완성한다.
이러한 구성은 작가가 보여준 일련의 전시를 통해 구체화된다. 사각형의 프레임을 넘어 공간과의 상호 작용을 만들어내는 구조는 그의 첫 개인전인 《비원향B1Hyang》(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에서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회화가 놓이는 물리적 환경은 곧 그것의 경험을 위한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다. 벽과 바닥, 기둥을 의식한 회화는 부분적인 혹은 파편적인 이미지를 활용함으로써 관객의 신체적 감각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에 더해 《핀홀Pinhole》(에이라운지 갤러리, 2021)에서는 관객의 눈이 이미지의 표면을 포착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이미지 내부에 겹겹의 층위를 두어 깊이감 있는 평면을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여기서는 작품을 서로 간 병치하는 과정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모종의 시각적 관계를 파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반면 《Odonata》(인천아트플랫폼, 2022)와 《O》(더 소소, 2022)에서는 이미지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련의 작품은 균질한 사이즈로 제작되어 흰 벽에 동일한 규격으로 나열된다. 이러한 구성은 등장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보다 명료히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드러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것도 명료히 지시하지 않는 이미지를 늘어놓는 행위로 귀결되며 그 해석의 권한을 관객에게 일임하고 있다. 최근의 개인전 《4painting》(Hall1, 2023)으로 넘어오면, 작품은 이전보다 명료한 구상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오히려 어떠한 것도 주장하지 않는 회화처럼 나타나게 된다. 개별적 이미지는 구상과 추상을 반복하며 복합적인 상으로 표출되고, 사진적으로 포착되거나 디지털로 변형된 모습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공간의 층고와 수평적 구획을 고려한 전시 구성은 시선의 구조를 정면에 두거나 평평한 곳으로 이동시킴으로써 공간과 조응함에 따라 새로운 관계성을 가지게 된 회화를 탐구하고 있다.
이진형은 자신의 회화를 통해 지시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드러냄으로써 다시금 회화의 ‘표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구조를 선택한다. 표면을 통해서만 감각될 수 있는 심상은 그 재료가 되었던 이미지의 지시성을 거스르고 있지만, 동시에 이미지를 가장 바깥에 놓인 대상으로 사유하도록 만듦으로써 본질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진형의 회화는 그렇기에 이미지로 시작하여 이미지로 귀결되며,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그리고 공간과의 관계를 통해 완성된다.
이진형 개인전 4painting
[4painting]이진형 개인전 전시서문
Hall 1 2023.8.30~9.22
문소영 (PS Sarubia 큐레이터)
굳이 말하자면,
삶은 뒤죽박죽된 기승전결의 연속이고 가능성과 우연의 충돌 속에서 무작위로 흘러간다. 그 안에서 맥락을 발견하는 것은 화자가 되는 자기 자신이다. 맥락은 재인과 회상으로부터 생성된다고 한다. 누군가의 사진첩에서 그 사람이 보인다면 사진첩의 주인에게 분명한 취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목을 끌기 위해 고안된 광고판은 스쳐 지나가면서 보이지도 않는 여름 끝 바람 냄새에 누군가가 떠오르는 건 기억 때문일 것이다. 생각을 사로잡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그 속에 머무는, 나도 모르게 사물과 나를 이어버리는 의미이다. 그리고 싶은 대상을 발견하고 눈 속에 담는 것은 유기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조형언어로서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작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 4painting에서 이진형은 회화를 통해 정제된 기승전결을 보여준다.
이진형은 숲을 보면서 그리면 그려지지 않을 것 같지만, 숲이라는 단서만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는 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원하는 상이 떠오를 때까지 두서없이 수집한 이미지 무리를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본다. 무리 속에서 원하는 부분이 포착됐을 때,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내용이 사라질 때까지 확대하거나 왜곡해 보며 시점을 변환시킨다. 그는 에스키스를 통해 형태를 손에 익히며 형상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대상을 마음속에 담아 만져보고, 형상이나 지표 같은 부수적인 것들이 말끔히 씻겨나가 온전히 감각만이 남겨지는 순간을 찾는다. 그렇게 정제된 이미지는 회화적 실험과 실천을 통해 캔버스 속 새로운 차원의 중력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화면의 윤기를 조절하거나 새로운 방식의 브러시스트로크를 시도하는 등 회화적 기법 안에서 심상을 캔버스 위에 불러올 방법을 연구하고, 이미지가 캔버스 위에 자리 잡은 이후에는 다시 한번 긴 응시의 시간을 통해 도자기를 빚듯, 머리카락을 자르듯, 꽃꽂이하듯 차분하게 심상의 균형을 맞춰나간다. 대상이 가지고 있던 피상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형상이 모호해진 만큼 매개체의 물성이 드러난다. 정제의 시간을 거친 이미지들은 마치 파도에 다듬어진 모래알이 저마다의 형상을 지니듯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로서 떠오르고, 이후 공간 속에서 새로운 구조를 형성한다. 그림은 단독적으로 걸리기도 하고 문장처럼 조합되어 서로에게 흡수되거나, 공명하며 서로의 화면을 보충해 주기도 한다.
그에게 이미지는 매개체이고 그것을 재료삼아 언어가 치환할 수 없는 내면을 회화적 물성으로써 소환하고 달성한다. 감각만을 남기는 과정 때문인지, 이진형의 작업은 한결같은 듯 매번 다른 표정을 하고 나타난다. 원본의 단서조차 알아차릴 수 없었던 첫 개인전의 이미지와 비교했을 때, 근작으로 다가올수록 과감하게 형상을 드러내고 색감의 쓰임이 넓어지며 농도가 진해진다. 이러한 변화는 언뜻 그의 작업이 추상에서 구상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진형의 작업은 구상을 기초로 하고 있고, 상을 구현하는 방식보다는 레퍼런스를 탐구하는 작가의 시점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는 이미지가 내지르는 정보와 의미가 잦아들고 그 속에 숨어있던 명명되지 않는 (할 수 없는)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을 찾아낸다. 참조된 원본의 의미를 모조리 소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속에서 의도치 않게 생성되어 의미를 편향시키는 카테고리를 해제하고 정립되지는 않지만 분명한 무언가만이 남을 때까지 걸러낸다. 원본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이미지 언어인 회화를 어떻게 눈에서 눈으로 사족없이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어떤 말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는 이름이 없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 없다고 분명히 느껴지는 감정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압도적이거나 반대로 사소한 감정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건,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고 의미를 두는 것이 달라 약속된 단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가는 그런 공란을 스스로 타고난 언어로 채우는 사람이다. 다만, 백문이 불여일견이 되기 위해선 일견 속에 수많은 시간이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한 폭의 작품이 제시해야 하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더 큰 결론으로 다다르기 위한 과정과 사색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진형의 회화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건져낸 감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조형언어를 통해 간결하게 제시한다. 4painting에서 글이 되어 떠오르는 의미는 잠시 잊고, 온전히 눈을 통해서만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볼 것을 제안해 본다.
Jin Hyung Lee’s solo exhibition: 4painting
8.30-9.22 @Hal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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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I must put this into words...
Life is a fragmented plot sequence that accidentally aligns amid the collision of possibility and coincidence. The artist discovers a context from the chaos, a context born between reaffirmation and recollection. If a group of photos resembles whom it belongs to, that would be a taste and how you remember the person. If an invisible end-of-summer breeze stops you while you ignore billboards designed to attract the eyes, that would be due to a recollection. What captivates the thoughts linked to an object are both the appearance and the meaning that lingers within the object. These unknowingly create a context between you and the object. Perceiving is an organic process, but painting to possess convincing power visually requires an artist's effort. Here at 4painting, Jin Hyung Lee unfolds his refined context through painting.
Jin Hyung said he cannot paint a forest by observing it directly but can if he recalls the forest and its clues. He looks at a group of images he has collected for a long time until a part of an image comes to mind. Once he captures a desired image, he expands or distorts it until the original symbolized or indexed image disappears. He touches and understands the object through his eyes instead of training his hands through sketches, looking for when sense remains after information such as form and index are washed away. He researches ways to convey the idea onto the canvas through painterly experimentation and practice, whether by adjusting the surface tones or finish or attempting a variation in brushstrokes. The refined image settles within the canvas, adapting to a new dimension and gravity. He then calmly balances the image, much like shaping clay, trimming hair, or arranging flowers, during another long period of contemplation. After the superficial original meaning is removed, the medium's materiality stands out as the form becomes more ambiguous. The refined image emerges as an individual being, as if each sand grain trimmed by the waves has its own shape. The paintings form a new structure in the gallery space. The images are displayed individually or gathered like a phrase, resonating with each other to expand the surface.
For him, images are a medium archiving and materializing the inner sense that words cannot replace. Due to his effort to filter the sensation, the paintings seem consistent yet reveal different impressions. Compared to the paintings from his first solo exhibition, where his references were hard to discern, more recent works give more clues about the original, widen his color use, and intensify the layer concentration. Through these changes, his practice may appear to be shifting from abstract to figurative. Still, Jin Hyung's work is grounded in figurative painting, and what's evolving is the artist's perspective of exploring references rather than rendering the figure. He seizes the moment when the words the image indicates fade away, and the nameless meaning faces out. It's not about wholly erasing the reference, but about unlocking the categories that unintentionally bias the interpretation and filtering out the meaning within the image until an unknown but distinct thing remains. What the reference image was is not essential; he conveys the visual language of painting from eye to eye without unnecessary context.
Some languages cannot be written in words, and some meanings have no name. If it was unknown but you felt something clear, that is enough. The inability to find verbs for overwhelming or comparably ordinary feelings would stem from each person's different perception or way of caring. However, artists give names to unknown things in their natural visual languages. Supposedly, "seeing is believing"; however, for a mere glance to become a comprehensive experience, it must contain a multitude of moments. An artwork should not present a conclusion but a time of contemplation that guides you to a greater meaning. Jin Hyung's paintings don't make strong assertions. Instead, he humbly conveys emotions through visual language, avoiding excessive elaboration. At 4painting, I suggest that visitors have a time of pure contemplation through the eyes, setting aside the meaning emerging in texts.
Text/ So Young Moon (PS Sarubia Curator)
인천아트플랫폼 2022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
IAP_ 2022 Artist-in-Residence Program Catalogue
보기로부터 이어지는 회화의 여정
The Pictorial Journey from "Seeing"
이현경 큐레이터 LEE HyunKyung
https://inartplatform.kr/reference/view?no=89
점유하지 않고 점유하는 시선
[O] 이진형 개인전 전시서문
더 소소 2022.10.29-11.25
전희정
갤러리 소소 큐레이터
점유하지 않고 점유하는 시선
대상을 설명하는 막연한 규정들 사이의 어딘가에 작가는 시선을 보낸다. 그의 홍채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가는 그 움직임이 멈춰 이미지가 고정되는 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순간순간 눈에 일어나는 모든 과정에 감각을 곤두세울 뿐이다. 그러다 그의 시각이 포착한 대상의 어느 속성을 화면에 옮기기 시작한다. 그것은 때로 형태이기도 하고, 색감이기도 하며, 질감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면에 그것을 그리는 순간, 작가의 시선은 다시 움직인다. 시선이 초점을 맞추는 과정, 그 어딘가에서 포착된 이미지는 그것이 화면에 옮겨지는 동안에도 고정되지 않고 여전히 움직이는 것이다.
이진형은 회화의 본질에 충실한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보고, 보이게 하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가 본다는 것은 대상이 가진 맥락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눈을 렌즈처럼 사용하여 시선이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그는 초점이 잡히기 직전 찰나의 순간을, 한 부분에 시점이 고정되며 주변이 흐릿해지는 줌 인의 순간을, 시선을 옮길 때 형태가 어그러져 보이는 순간을 ‘본다’. 그리고는 자신이 본 것을 화면에 옮겨 그것을 보이게 한다. 이 과정에서도 그는 보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작품은 작가의 시선이 무엇인가를 포착한 순간마다 섬세한 겹을 갖추게 된다.
작가는 이 겹을 표현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캔버스 전면을 도포한다. 켜켜이 물감이 쌓이며 붓 자국도, 물감의 묵직한 물성도 서서히 희미해진다. 종국적으로 아득히 가라앉은 여러 겹의 이미지 위에 물감의 고운 입자만이 남은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화면이 남는다. 작가가 시각의 모든 순간에 충실하며 그것을 치밀하게 옮기는 동안, 작품은 대상이 가진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지고 작가가 포착한 순간의 이미지들에서도 멀어지며, 오직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로 완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화면에 옮긴 완벽한 구상화이자, 대상에서 추출한 순수 조형요소만으로 완성된 추상화인 그의 작품은 그 모두로부터 다시 한 번 멀어지며 이진형만의 회화가 되었다.
움직이는 시선이 대상의 표면 위에 잠시 머무는 순간들을 잡아 자신만의 회화를 만들어온 이진형은 이제 자신의 발걸음을 넓히려 하고 있다. 이번 전시 제목 ‘O’는 알파벳으로도 읽히고, 숫자로도 인식되며, 도형으로도 보인다. 다양한 해석을 향해 열려 있는 이 전시 제목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을 자유롭게 볼 것을 감상자에게 권유한다. 대상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거리를 두려 하고, 고정된 해석에서 멀어지려 노력하며, 화면에 그려지고 있는 이미지에서조차 한걸음 물러서왔던 작가는 이것이 자신의 방식임을, 무척이나 열린 방식으로 단단한 정체를 갖추어 왔음을 말한다. 나아가 감상자의 눈을 통해 다시 한번 확고하게 자리잡은 이미지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것이다.
이진형의 시선은 대상의 온전한 모습을 점유하려 하지 않고 떠돈다. 그의 손은 그가 포착한 대상의 어느 속성을 꽉 쥐려 하지 않고 그 위를 덮고 덮는다. 마치 의미도 형태도 고정되지 않은 상태의 미묘한 순간에 있는 O처럼 이진형은 미세한 틈 사이의 어디에서 회화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그는 완곡하게 연결된 선으로 자신만의 완결성을 갖춘 O와 같이 자신만의 단단하고 명료한 회화를 가지게 되었다. 이진형은 이제 우리에게 열린 시선으로 회화를 볼 것을, 그럼으로써 다시 한 번 그 이미지가 움직이게 하기를 권유한다. 어느 것도 점유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만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그의 회화는 우리가 보고 있지만 결코 인식하지 못했던 무한한 시각의 영역을 향하고 있다.
Captured gazes without perception
Jinhyung Lee sends his gaze to a spot amid vague regulations describing an object. His iris begins to move to focus on the object. He does not wait for the moment when the movement of its image stops, and the image is fixed. He simply awakens his senses for every step happening in front of his eyes from moment to moment. It could be in a certain form, color, or texture. The moment he draws it on the canvas, his gaze moves again. The process by which his gaze focuses, or the image captured somewhere is not fixed and is still moving, even as it is transferred to the canvas.
Jinhyung Lee is an artist who is faithful to the essence of painting. His work consists of the act of seeing and showing. For him, seeing is different from understanding the context of an object. He thoroughly uses his eyes as lenses to focus on every moment his gaze moves. Therefore, he “sees” the moment just before the focus sets in, the moment when the point of view is fixed on one part and the surroundings become blurry, and the moment when the form is distorted upon the movement of gazing. He then transcribes what he sees to the canvas to show it. Even in this process, he never stops seeing, so his work is stacked with delicate layers every moment his gaze captures something.
Lee repeatedly covers the entire surface of the canvas to express the layers. As the paint accumulates, the brush marks and the heavy properties of the paint gradually fade. A delicate and beautiful canvas is left on top of the many layers of images that have sunk away, with only fine particles of the paint remaining. While Lee is faithful to every moment of his vision and meticulously transcribes it on canvas, his work moves away from the original form of the object and away from the images of the moment he captured and is completed as a single independent image. In this way, his oeuvre – perfect figurative painting transposing objects to the canvas as they are, and abstract painting completed only with pure figurative elements extracted from objects – ends up being his unique painting taking a step once again from all of those.
Lee created his own style of painting by capturing moments when the moving gaze stays on the surface of objects for a while. He is now trying to broaden up his horizons. The title of this exhibition O is read as an alphabet, recognized as a number, and seen as a figure. Like the title of this exhibition, which is open to a variety of interpretations, he invites the audience to look at his work in a free-spirted manner. He has tried to distance himself from the fixed image of objects, and move away from their fixed interpretation, and taken steps back even from the images conveyed on the canvas said that this is his way of doing art, having established his identity as an artist in such an open way. He also intends to push the limits of firmly established images through the eyes of the viewers.
Lee’s gaze drifts away, not trying to occupy the entire images of objects. His hand covers them without trying to tightly grasp any attributes of the objects he keeps eyes on. Just like “O” in a subtle moment in which neither meaning nor form is fixed, Lee has been painting somewhere amid microscopic gaps. And he came to tout his firm, clear style of painting like “O” which has its own completion with roughly connected lines. Jinhyung Lee recommends us to look at his painting with an open mind so that the images may move once again. His painting, which occupies its own place by occupying nothing, is directed towards an infinite realm of vision that we are seeing but have never recognized.
Chun Heejung (Gallery SoSo)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핀홀 pinhole] 이진형 개인전 전시서문
에이라운지 갤러리 2021.06.17~07.17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성휘
이진형은 다양한 시각 매체들이 생산해내는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이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지속적으로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습관으로 인해 이진형은 이미지를 처음 수집할 당시 의미나 맥락, 성격에 대해 파악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이미지가 처음에 보여주었던 것들이 희미해지는 순간을 조우하게 되었고, 이를 흥미롭게 여기게 되었다. 이 지점을 이진형은 대상과 대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또는 정적과 소음의 어느 중간 즈음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지점에 놓인 이미지들을 작업의 재료로 삼으며 작가는 이미지가 가진 분위기의 질감과 구조적 윤곽을 부분적으로 포착하여 화면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렇게 탄생하는 이진형의 회화는 원래의 이미지에서 얼마나 탈각해 있을까? 작가는 자신의 회화가 이미지가 지녔던 원래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개체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그 희미해지는 지점을 역설적이게도 보다 명료하게 포착해 작업을 정확히 그곳에 위치시키고자 노력한다.
핀홀: 눈의 역할
이진형의 회화에서는 눈의 역할이 중요하다. 작가가 이번 전시의 제목을 ‘핀홀’로 결정하게 된 이유에는 핀홀 효과라는 현상이 작가의 습관이자 작업 방식과 일견 닮아 있기 때문인데, 이 핀홀 효과는 눈을 찡그리면 눈 앞의 상이 좀더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무의식적으로 눈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선명해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다소 흐릿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시하지만 이 선명함이나 흐릿함의 정도는 작업 과정 중에 끊임없이 찡그린 눈으로 캔버스를 바라보면서 작가가 선택한 어떤 지점이다. 마치 상을 얻어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또한 구멍의 크기와 거리 조절의 섬세함 때문에 선명한 이미지를 획득하기가 어려운 핀홀 카메라처럼, 그의 회화는 대상과 눈 사이를 오가며 어떤 중간 지점에서 결정되는 초점 거리와도 같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그의 작품이 지니는 미지의, 그러나 분명한 초점 거리는, 작품을 대면하는 관람자로 하여금 앞으로 다가서거나 뒤로 물러서서 좀더 선명한 상을 포착하려는 움직임을 유도한다. 이때 눈이 파악하는 정보가 몸의 움직임을 이끄는 것이다. 작품 앞에서 눈은 당연히 이미지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수순을 먼저 밟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쉽사리 힌트를 주지 않고, 눈이 발견하는 것은 캔버스 위에 고르게 도포된 물감의 표면 질감과 발색이다. 이 표면은 형상을 보여주지 않고 먹먹한 느낌을 가득 전달한다. 캔버스 표면을 훑어 내려가는 눈은 환영을 거부당한 채 물감만 아니라 주변의 소리까지 흡수한 듯한 먹먹한 캔버스 표면 앞에서 서성이게 된다.
이미지에서 이탈하려는 회화
이진형은 사진을 참조하되 끊임없이 원본 이미지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를 해왔다.[1] 2010년대 중후반 작업들을 보면 그는 전부터 사진을 참조해왔지만 원본 이미지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캔버스 위에서 새로이 구성되는 이미지의 표면을 만들어내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진형의 캔버스에서 붓질이나 물감의 얼룩이 사라져가고 매끈한 표면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 표면에는 레이어가 있되 캔버스 화면 위로 켜켜이 중첩되는 것이 아니라 화면 아래로 침잠하는 레이어가 쌓인다. 모든 흔적과 제스처는 측정할 수 없는 하나의 깊이를 지닌다. 예컨대, 작가가 참여했던 그룹전 《지표면이 융기와 침강을 반복한다》(신한갤러리 역삼, 2018)와 첫 개인전 《비원향》(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에 소개되었던 작품들은 3-4년의 짧은 시간 동안 그가 회화 표면을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보여준다. 모두 <Untitled>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들은 그림이라는 것 외에는 이미지의 내용을 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 티가 역력하다. 작가는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도록 이미지의 부분 또는 파편, 아니면 애매한 상황을 선택하였다. 원본 이미지의 어떤 부분이 캔버스로 이동해와서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없게 했다.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관람자는 화면의 구조나 표면에 좀더 시선을 둘 수밖에 없게 된다. 아울러 그림이 공간과 관계 지어지는 방식을 살피게 된다. 이 순간 회화는 회화 그 자체로서 공간을 점유하게 된다. 특히 《비원향》에 소개된 작업들은 마치 사루비아 공간의 일부인 것처럼 벽과 바닥, 기둥을 의식할 뿐, 붓질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작가의 감정이나 제스처를 좀처럼 전달하지 않는다. 당시 그림들을 추상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abstract, 설명을 줄이고, 감정을 줄이고, 오로지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운 공기를 향해 회화 표면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리라.
회화 표면에서 벌어지는 사건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가 ‘무제’라는 제목 대신 개별 제목을 암시하거나 염두하고 작업한 작품들이 있다. 이는 이미지에 선험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려 한 기존의 태도와는 약간 다른 점이다. 예컨대, 다섯 점의 10호 연작 <Untitled(Closer)>는 ‘closer’ 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작가는 이 단어를 작업 중에 붓질과 터치를 통해 자신이 느낀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붓질과 터치로 느끼는 감각은 작가만의 것이기에 그림을 만질 수는 없는 관람자 입장에서는 그림 가까이 다가가는 것 외엔 그 감각과 이를 통한 감정에 대해 유추할 방법이 달리 없다. 그래서 이들 그림으로 다가서서 눈을 가까이해보면 우리는 이미지가 점점 물질로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뒤로 물러서 볼 때는 언뜻 아지랑이나 빛이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사실 물감 입자가 고르게 도포된 표면이며,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미묘하게 색상이 퍼져 나가는 가운데 희끗희끗한 입자가 불규칙적으로 산포 되어 있다. 한두 가닥 스치듯 그려진 가는 선들도 물감 입자가 도포된 층 아래로 지나간다. 따라서 캔버스의 최상위층에는 물감의 고운 입자가, 그 아래로 이미지가 가라앉아 존재한다. 이 표면 입자들이 만들어내는 색의 뉘앙스는 조명과 시선의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변한다. 회색 아래에서 푸른색이 스며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검정색 아래에서 붉은 색이 스며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진형은 유화 물감을 사용할 때 안료와 오일이 혼합된 제품을 사용하지만 오일을 걸러내기도 하여 물감 표면의 빛반사 정도를 조정하곤 한다. 특히 이번 에이 라운지 전시장 중앙벽에 걸려 있는 <Untitled(Resonance)>는 검정색 물감에서 린시드 오일을 상당량 걸러내 남은 안료를 주로 사용하여 그렸다. 반타 블랙처럼 빛반사율 0%에 도전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검정색은 빛반사를 줄여 캔버스 표면 아래에서부터 색이 스며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스피커 그릴 천의 표면을 보는 것처럼 주위의 소리마저 흡수해버릴 것만 같다. 작가는 필자에게 이 검정색 아래에 칠해진 색들이 자기 소리를 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부제를 ‘resonance’ 즉 ‘공명’으로 생각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그 공명의 소리가 화면 밖으로 웅장하게 울리는 것이 아니라 검정색에 흡착되어 캔버스 아래로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색의 뉘앙스를 은근하게 지닌 채 말이다.
앞서 필자는 이진형의 회화를 설명하면서 ‘선명하거나 흐릿하거나’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원본 이미지에 대한 전제가 깔린 표현으로, 이진형의 회화를 원본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탈각 시켜 회화 그 자체로만 본다면, 그의 회화는 재현 대상과 비교되어 흐릿하다는 표현을 들을 이유가 사실은 없다고 해야 맞다. 오히려 그의 회화 표면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은 색들의 흡착과 이들의 공명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뉘앙스다. 흔히 우리는 색은 빛에 의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괴테는 색채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색채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빛과 암흑, 즉 빛과 비광이 요구된다고 했다. 또 색은 반광으로, 반그림자로도 여겨질 수 있다고 하였다.[2] 무엇보다도 괴테는 색채를 뉴턴의 광학처럼 객관적 실체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관찰자, 즉 우리 눈과 연계되어 있는 현상임을 강조하였다.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화가들에게 숙명적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진형은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한 질문보다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좀더 초점을 맞춘다. 이때 그의 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애당초 그가 이미지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오래 동안 반복적으로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그의 눈은 다음과 같은 괴테의 말을 경험한 것 같다.
“눈은 한순간이라도 물체에 의해 규정되는 특정한 상태에 그대로 머물 수 없으며 또한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은 일종의 대립을 강요받는다. 말하자면 그러한 대립은 극단을 극단에, 평범한 것을 평범한 것에 대치시키고 즉시에 대립적인 것들을 결합시키면서 그리고 동시적으로 그 자리에서 전체를 지향한다.”[3]
이진형의 회화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하였지만 원래의 이미지를 닮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 앞에서 눈을 찡그리는 관람자는 안개 너머에 있을 것만 같은 존재를 파악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의 회화는 이미지를 숨기지 않았다. 회화의 정체성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미지라는 속성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진형의 회화는 명료하게 존재하고자 한다.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기를 욕망하면서 독립된 개체가 되고자 한다. 리히터는 블러 기법으로 잘 알려진 1960-70년대 자신의 사진회화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한 적이 있다.
“실재에 대한 제 자신의 관계는 희미함, 불안함, 두려움, 파편적임 등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 그림들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설명할 따름이죠. 그림들은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제 그림들은 결코 흐릿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흐리다고 보는 것은 부정확함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재현된 대상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그림은 실재와 비교되기 위해서 그려지는 것이 아닌 만큼 그림은 흐려질 수도, 부정확할 수도, 또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캔버스 위의 색깔들이 어떻게 흐려질 수 있나요?”[4]
W.J.T. 미첼이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미첼은 ‘원한다’는 표현이 역설적으로 ‘결여’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5] 이 질문을 이진형의 회화에 적용하면, 그의 회화는 보기를 보여주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시각예술을 하지만 정작 보는 것에 충실하지 않다. 이미지가 범람할수록 시각은 불성실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보기’가 결여된 우리와 이미지 사이에 이진형의 회화가 위치하고 있다.
[1] 사진을 참조하되 원본 이미지에서 이탈하는 회화를 추구하는 점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사진회화 시리즈인 <Ausschnitt> 작업들을 연상시킨다.
[2] 괴테, 『색채론』,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16, p.43.
[3] 괴테, 앞의 책, p.56.
[4] 리히터와 Rolf Schön과의 대담(1972). 국립현대미술관,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서울: 컬처북스, 2003), p.28에서 재인용.
[5] W.J.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김전유경 옮김, 서울: 그린비, 2016, p.68.
[비원향B1Hyang] 이진형 개인전 전시서문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3.25-4.24
문소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기척 없이 다가와 시야를 전복하는 것이 있다―온도가 바꾸는 계절의 냄새, 피부에 닿는 햇빛과 바람의 온도, 밤이 색을 지워버리자 드러나는 형태, 그런 것들이 환기시키는 기억, 그리고 멀어진 시간의 거리만큼 낯설어진 장소와 물건들. 세상은 분명한 것보다 모호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텅 빈 사루비아의 전시장에서, 작가는 공간이 가득 차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어떤 향을 감지한다. 『비원향』은 우리가 알고 있던 대상의 맥락을 뒤틀어 생경하게 드러내고 회화적 물성으로 실현하려는 작가의 시도를 수반한다.
이진형은 사진, 영화 등의 시각 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무작위로 수집한다. '수집된 이미지에는 그것을 수집한 사람의 의도와 취향이 묻어있다.'(작가노트, 2019). 선택된 이미지는 그것이 지시하던 대상이 연상되지 않을 때까지 가공되거나 일부만을 남긴 채 지워지고, 그 과정에서 포착된 색감과 형태는 캔버스로 옮겨진다. 캔버스로 옮겨진 이미지는 작가의 감각과 물감을 덧입으며 개별적인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진형의 작업은 대부분 구상적인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는 명확한 서사를 통해 그것을 전달하기보다는 모호하고 생경한 형태로, 회화의 물성을 통해 드러내는 것을 택한다. 하나의 의미가 이미지를 단정 지어버리는 것을 막고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경험과 해석을 가져갈 수 있도록, 직접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기보다는 최대한 심상이 머금은 공기와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집된 이미지와 형태는 작가의 감각을 환기하는 촉매이고, 화면 위에 전사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추출되고 축적된 후 다듬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진형은 그림을 이해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는 장면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공기처럼 부유하던 감각을 회화적인 물성으로 (얇고 투명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깊은 회화로) 물질화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 이진형의 작업은 무엇을 그린다기보다는 어떻게 그리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사유는 형상을 빚어내듯 떠오른다. 흩어져있던 심상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정적이 선명해지는 순간을 찾을 때까지, 작가는 이미지를 다듬고 섬세한 선이나 자국을 더하며 신중하게 밸런스를 맞춰나간다. 일련의 작업들도 한정된 방법에 머무르지 않고 톤, 크기, 농도, 미디엄 등을 다양하게 실험하며 전개된다. 작가는 화면을 구성할 때 그림과 그림 사이의 연결성을 고려하면서 작업을 진행해나간다. 하지만 이는 장면으로써 그림을 잇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회화의 물성을 실험하고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표면들 사이에 접점이 생기고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농도와 기법을 연구하며 다른 갈래로 뻗어 나가는 것 같았던 그림들은 작가가 작업을 어떻게 전시할지, 어떻게 함께 놓을지를 염두에 두는 과정에서 다시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
이진형 회화의 물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지만, 주로 수채화처럼 표면 위에 잔잔하게 스며든 형태나 잔여물 없이 매끈하게 처리된 표면을 통해 드러난다. 작가는 브러시스트로크(brush-strokes)처럼 손에 의한 기법을 좀 더 다양하고 유연하게 구사하고자 지지체(painting supports)와 바닥칠(grounds and primer)의 연구를 겸행한다. 회화의 표면에는 습관과 스타일에 의해 이루어지는 형태 묘사, 물감의 농도, 브러시스트로크가 있고, 기교와는 별개로 그림의 토대가 되는 원단, 종이, 나무 등의 지지체, 그리고 안료를 고정시키기 위한 바닥칠로 이뤄져 있다. 작가의 연구는 캔버스 틀은 변형하거나 해체하기보다는, 기본 형태인 직사각형을 유지하되 원단과 바닥칠의 쓰임을 다양하게 하여 얇지만 깊이 있는 표면을 구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캔버스의 통일된 형태는 지지체의 쓰임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물을 부각시킨다.
작업이 전시장으로 들어올 때, 작가는 다시 한번 균형을 생각하게 된다. 공간은 새로운 화면이 되고 이미지들은 그 안에서 다시 배치된다. 형체도 없이 시야를 전복시킨 지하의 향처럼, 때로는 정립되지 않는 것이 더 명확할 때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것들도 한때는 미지의 존재였다. 작가는 대상의 형태를 빌리거나 맥락을 가진 이미지로써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생명력을 얻어 스스로 말을 건네기를 바란다고 했다. 『비원향』을 통해 회화를 은유가 아닌 독자적인 개체로 선보이고, 의미를 열어놓은 낯선 존재로써 다양한 해석이 공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회화와/의 환경
[비원향B1Hyang] 이진형 개인전 심층비평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3.25-4.24
안소연
미술비평가
“무제 Untitled”로 이름 붙여진 이진형의 회화는 대개 어떤 형상을 품고 있는 추상의 구조를 나타낸다. 그것이 간혹 이름 없는 무채색의 텅 빈 추상적 화면을 극단적으로 드러낼지라도, 어쩐지 회화의 화면 바깥을 한없이 상상하다 보면 어떤 익숙한 형상과 맞닿게 될지 모를 확신이 생긴다. 이처럼 회화의 바깥을 상상하려는 충동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진형이 회화 제작 과정에서 인식하는 일련의 선택적 조건들이 전시를 매개로 그의 회화에 대한 경험에서 일련의 (매체적 관습에 따른) 예정된 결과들로 인해 재인식되는 구조적인 맥락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애초에 작업의 과정에서 “회화의 조건”으로 그에 의해 선택된 개별적인 임의의 요소들이 회화의 평면으로 수렴되는 결과를 전시에서 마주했을 때, 흥미롭게도, 다시 임의의 회화적 조건에 대해 재인식하게 하는 끝없는 매체 특정적 구조의 되풀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이진형은 회화에 대한 매체 특정적 형식 논리를 스스로 재구축해 회화의 조건을 갱신하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때 강조되는 것은 회화의 평면이 촉발시키는 신체의 경험이며 공간적 지각(소통)이다.
⟪비원향B1Hyang⟫이라는 전시 제목이 드러내듯, 이진형은 전시 공간의 물리적 환경과 그것에 대한 신체적 감각을 크게 강조했다. 이는 그의 회화가 만들어지는 조건이자, 또 그의 (만들어진) 회화가 경험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그가 회화의 평면에 수렴시킨 그것의 바깥 환경에 대한 감각적 논리를 다시 회화의 환경으로 확장되는 전시 경험에서 반복하는 셈이다. 우선, 그가 만들어낸 회화의 평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나는 온통 “무제”인 그의 작업을 이 지면에 호명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그것이 공간에 놓인 관계를 말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데,) 전시 공간에 안정적으로 진입했을 때 한쪽 벽에 똑같은 크기(116.8x91cm)로 거의 바짝 붙은 채 짝 지어 걸린 두 점의 <Untitled>(2019)나 둘 사이의 선명한 다름-초록색과 회색이 각각 차지하고 있는 큰 바탕 면- 보다 미세한 닮음-마주한 모서리에 살짝 걸쳐 있는 추상적 패턴의 색감과 흐릿한 자국처럼 화면에 남겨진 붉은 색의 붓질- 때문에 공간에서의 연속된 흐름을 설계하는 또 다른 두 점의 <Untitled>(2020)과 그밖에 서로의 화면을 반영하고 스스로를 반사하듯 어떤 힘의 관계를 주고 받으며 벽과 바닥에 배치된 다수의 <Untitled>들(2019-2020)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이진형의 회화가 모두 무제인 까닭은, 그것이 단지 “그림”으로 보였으면 하는 그의 다부진 속내에 기인하는 것인데, 또한 그가 자신의 주변 환경에서 취득해 온 수많은 이미지들을 참조한 결과물로서의 추상적 회화가 이미지를 선택하여 처리해 온 자신의 감각적 경험과 동일한 과정으로 체험되기를 바라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미지의 선택과 처리에 있어서, 그는 “무제”의 함의처럼 그 대상에 깃든 현실의 서사를 비워내고 (서사 없이 서사를 구축할 요량으로) 회화의 재료와 기법으로 변환되는 감각의 논리를 극대화 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경험을 재고한다. 요컨대, 이진형은 회화의 제작 과정에서 익명의 신체가 경험하게 될 회화의 환경을 염두에 둔다. 이는 그가 어쩌면 회화의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미지의 선택과 처리의 과정 뿐 아니라 그것을 회화적으로 변환시킬 재료와 기법의 선택 및 처리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감각적 “지각”이 회화적 환경으로 구축될 때 익명의 신체들과 경험을 공유할 회화의 가능성을 찾고 있기 때문일 테다.
Untitled
월간미술 2021년 8월호
에디터스 픽 EDITOR'S PICS (p69)
https://monthlyart.com/portfolio-item/2021%eb%85%84-8%ec%9b%94-%ec%a0%9c439%ed%98%b8/
Untitled
월간미술 2020년 5월호
업앤커밍 아티스트 UP-AND-COMING ARTIST (p130~131)
염하연 기자
https://monthlyart.com/portfolio-item/2020%eb%85%84-5%ec%9b%94-%ec%a0%9c424%ed%98%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