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핀홀 pinhole] 이진형 개인전 전시서문

​에이라운지 갤러리 2021.06.17~07.17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성휘

 

이진형은 다양한 시각 매체들이 생산해내는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이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지속적으로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습관으로 인해 이진형은 이미지를 처음 수집할 당시 의미나 맥락, 성격에 대해 파악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이미지가 처음에 보여주었던 것들이 희미해지는 순간을 조우하게 되었고, 이를 흥미롭게 여기게 되었다. 이 지점을 이진형은 대상과 대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또는 정적과 소음의 어느 중간 즈음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지점에 놓인 이미지들을 작업의 재료로 삼으며 작가는 이미지가 가진 분위기의 질감과 구조적 윤곽을 부분적으로 포착하여 화면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렇게 탄생하는 이진형의 회화는 원래의 이미지에서 얼마나 탈각해 있을까? 작가는 자신의 회화가 이미지가 지녔던 원래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개체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그 희미해지는 지점을 역설적이게도 보다 명료하게 포착해 작업을 정확히 그곳에 위치시키고자 노력한다.

 

핀홀: 눈의 역할

 

이진형의 회화에서는 눈의 역할이 중요하다. 작가가 이번 전시의 제목을 ‘핀홀’로 결정하게 된 이유에는 핀홀 효과라는 현상이 작가의 습관이자 작업 방식과 일견 닮아 있기 때문인데, 이 핀홀 효과는 눈을 찡그리면 눈 앞의 상이 좀더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무의식적으로 눈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선명해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다소 흐릿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시하지만 이 선명함이나 흐릿함의 정도는 작업 과정 중에 끊임없이 찡그린 눈으로 캔버스를 바라보면서 작가가 선택한 어떤 지점이다. 마치 상을 얻어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또한 구멍의 크기와 거리 조절의 섬세함 때문에 선명한 이미지를 획득하기가 어려운 핀홀 카메라처럼, 그의 회화는 대상과 눈 사이를 오가며 어떤 중간 지점에서 결정되는 초점 거리와도 같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그의 작품이 지니는 미지의, 그러나 분명한 초점 거리는, 작품을 대면하는 관람자로 하여금 앞으로 다가서거나 뒤로 물러서서 좀더 선명한 상을 포착하려는 움직임을 유도한다. 이때 눈이 파악하는 정보가 몸의 움직임을 이끄는 것이다. 작품 앞에서 눈은 당연히 이미지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수순을 먼저 밟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쉽사리 힌트를 주지 않고, 눈이 발견하는 것은 캔버스 위에 고르게 도포된 물감의 표면 질감과 발색이다. 이 표면은 형상을 보여주지 않고 먹먹한 느낌을 가득 전달한다. 캔버스 표면을 훑어 내려가는 눈은 환영을 거부당한 채 물감만 아니라 주변의 소리까지 흡수한 듯한 먹먹한 캔버스 표면 앞에서 서성이게 된다.

이미지에서 이탈하려는 회화

 

이진형은 사진을 참조하되 끊임없이 원본 이미지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를 해왔다.[1] 2010년대 중후반 작업들을 보면 그는 전부터 사진을 참조해왔지만 원본 이미지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캔버스 위에서 새로이 구성되는 이미지의 표면을 만들어내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진형의 캔버스에서 붓질이나 물감의 얼룩이 사라져가고 매끈한 표면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 표면에는 레이어가 있되 캔버스 화면 위로 켜켜이 중첩되는 것이 아니라 화면 아래로 침잠하는 레이어가 쌓인다. 모든 흔적과 제스처는 측정할 수 없는 하나의 깊이를 지닌다. 예컨대, 작가가 참여했던 그룹전 《지표면이 융기와 침강을 반복한다》(신한갤러리 역삼, 2018)와 첫 개인전 《비원향》(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에 소개되었던 작품들은 3-4년의 짧은 시간 동안 그가 회화 표면을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보여준다. 모두 <Untitled>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들은 그림이라는 것 외에는 이미지의 내용을 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 티가 역력하다. 작가는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도록 이미지의 부분 또는 파편, 아니면 애매한 상황을 선택하였다. 원본 이미지의 어떤 부분이 캔버스로 이동해와서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없게 했다.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관람자는 화면의 구조나 표면에 좀더 시선을 둘 수밖에 없게 된다. 아울러 그림이 공간과 관계 지어지는 방식을 살피게 된다. 이 순간 회화는 회화 그 자체로서 공간을 점유하게 된다. 특히 《비원향》에 소개된 작업들은 마치 사루비아 공간의 일부인 것처럼 벽과 바닥, 기둥을 의식할 뿐, 붓질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작가의 감정이나 제스처를 좀처럼 전달하지 않는다. 당시 그림들을 추상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abstract, 설명을 줄이고, 감정을 줄이고, 오로지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운 공기를 향해 회화 표면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리라.

 

회화 표면에서 벌어지는 사건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가 ‘무제’라는 제목 대신 개별 제목을 암시하거나 염두하고 작업한 작품들이 있다. 이는 이미지에 선험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려 한 기존의 태도와는 약간 다른 점이다. 예컨대, 다섯 점의 10호 연작 <Untitled(Closer)>는 ‘closer’ 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작가는 이 단어를 작업 중에 붓질과 터치를 통해 자신이 느낀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붓질과 터치로 느끼는 감각은 작가만의 것이기에 그림을 만질 수는 없는 관람자 입장에서는 그림 가까이 다가가는 것 외엔 그 감각과 이를 통한 감정에 대해 유추할 방법이 달리 없다. 그래서 이들 그림으로 다가서서 눈을 가까이해보면 우리는 이미지가 점점 물질로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뒤로 물러서 볼 때는 언뜻 아지랑이나 빛이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는 사실 물감 입자가 고르게 도포된 표면이며,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미묘하게 색상이 퍼져 나가는 가운데 희끗희끗한 입자가 불규칙적으로 산포 되어 있다. 한두 가닥 스치듯 그려진 가는 선들도 물감 입자가 도포된 층 아래로 지나간다. 따라서 캔버스의 최상위층에는 물감의 고운 입자가, 그 아래로 이미지가 가라앉아 존재한다. 이 표면 입자들이 만들어내는 색의 뉘앙스는 조명과 시선의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변한다. 회색 아래에서 푸른색이 스며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검정색 아래에서 붉은 색이 스며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진형은 유화 물감을 사용할 때 안료와 오일이 혼합된 제품을 사용하지만 오일을 걸러내기도 하여 물감 표면의 빛반사 정도를 조정하곤 한다. 특히 이번 에이 라운지 전시장 중앙벽에 걸려 있는 <Untitled(Resonance)>는 검정색 물감에서 린시드 오일을 상당량 걸러내 남은 안료를 주로 사용하여 그렸다. 반타 블랙처럼 빛반사율 0%에 도전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검정색은 빛반사를 줄여 캔버스 표면 아래에서부터 색이 스며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스피커 그릴 천의 표면을 보는 것처럼 주위의 소리마저 흡수해버릴 것만 같다. 작가는 필자에게 이 검정색 아래에 칠해진 색들이 자기 소리를 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부제를 ‘resonance’ 즉 ‘공명’으로 생각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그 공명의 소리가 화면 밖으로 웅장하게 울리는 것이 아니라 검정색에 흡착되어 캔버스 아래로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색의 뉘앙스를 은근하게 지닌 채 말이다.

앞서 필자는 이진형의 회화를 설명하면서 ‘선명하거나 흐릿하거나’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원본 이미지에 대한 전제가 깔린 표현으로, 이진형의 회화를 원본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탈각 시켜 회화 그 자체로만 본다면, 그의 회화는 재현 대상과 비교되어 흐릿하다는 표현을 들을 이유가 사실은 없다고 해야 맞다. 오히려 그의 회화 표면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은 색들의 흡착과 이들의 공명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뉘앙스다. 흔히 우리는 색은 빛에 의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괴테는 색채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색채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빛과 암흑, 즉 빛과 비광이 요구된다고 했다. 또 색은 반광으로, 반그림자로도 여겨질 수 있다고 하였다.[2] 무엇보다도 괴테는 색채를 뉴턴의 광학처럼 객관적 실체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관찰자, 즉 우리 눈과 연계되어 있는 현상임을 강조하였다.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화가들에게 숙명적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진형은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한 질문보다는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좀더 초점을 맞춘다. 이때 그의 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애당초 그가 이미지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오래 동안 반복적으로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나 그의 눈은 다음과 같은 괴테의 말을 경험한 것 같다.

 

“눈은 한순간이라도 물체에 의해 규정되는 특정한 상태에 그대로 머물 수 없으며 또한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은 일종의 대립을 강요받는다. 말하자면 그러한 대립은 극단을 극단에, 평범한 것을 평범한 것에 대치시키고 즉시에 대립적인 것들을 결합시키면서 그리고 동시적으로 그 자리에서 전체를 지향한다.”[3]

 

이진형의 회화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하였지만 원래의 이미지를 닮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 앞에서 눈을 찡그리는 관람자는 안개 너머에 있을 것만 같은 존재를 파악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의 회화는 이미지를 숨기지 않았다. 회화의 정체성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미지라는 속성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진형의 회화는 명료하게 존재하고자 한다.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기를 욕망하면서 독립된 개체가 되고자 한다. 리히터는 블러 기법으로 잘 알려진 1960-70년대 자신의 사진회화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한 적이 있다.

 

“실재에 대한 제 자신의 관계는 희미함, 불안함, 두려움, 파편적임 등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 그림들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설명할 따름이죠. 그림들은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제 그림들은 결코 흐릿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흐리다고 보는 것은 부정확함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재현된 대상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그림은 실재와 비교되기 위해서 그려지는 것이 아닌 만큼 그림은 흐려질 수도, 부정확할 수도, 또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캔버스 위의 색깔들이 어떻게 흐려질 수 있나요?”[4]

 

W.J.T. 미첼이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미첼은 ‘원한다’는 표현이 역설적으로 ‘결여’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5] 이 질문을 이진형의 회화에 적용하면, 그의 회화는 보기를 보여주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시각예술을 하지만 정작 보는 것에 충실하지 않다. 이미지가 범람할수록 시각은 불성실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보기’가 결여된 우리와 이미지 사이에 이진형의 회화가 위치하고 있다.

 

[1] 사진을 참조하되 원본 이미지에서 이탈하는 회화를 추구하는 점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사진회화 시리즈인 <Ausschnitt> 작업들을 연상시킨다.

[2] 괴테, 『색채론』,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16, p.43.

[3] 괴테, 앞의 책, p.56.

[4] 리히터와 Rolf Schön과의 대담(1972). 국립현대미술관,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서울: 컬처북스, 2003), p.28에서 재인용.

[5] W.J.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김전유경 옮김, 서울: 그린비, 2016, p.68.

[비원향B1Hyang] 이진형 개인전 전시서문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3.25-4.24

문소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기척 없이 다가와 시야를 전복하는 것이 있다―온도가 바꾸는 계절의 냄새, 피부에 닿는 햇빛과 바람의 온도, 밤이 색을 지워버리자 드러나는 형태, 그런 것들이 환기시키는 기억, 그리고 멀어진 시간의 거리만큼 낯설어진 장소와 물건들. 세상은 분명한 것보다 모호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텅 빈 사루비아의 전시장에서, 작가는 공간이 가득 차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어떤 향을 감지한다. 『비원향』은 우리가 알고 있던 대상의 맥락을 뒤틀어 생경하게 드러내고 회화적 물성으로 실현하려는 작가의 시도를 수반한다. 

이진형은 사진, 영화 등의 시각 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무작위로 수집한다. '수집된 이미지에는 그것을 수집한 사람의 의도와 취향이 묻어있다.'(작가노트, 2019). 선택된 이미지는 그것이 지시하던 대상이 연상되지 않을 때까지 가공되거나 일부만을 남긴 채 지워지고, 그 과정에서 포착된 색감과 형태는 캔버스로 옮겨진다. 캔버스로 옮겨진 이미지는 작가의 감각과 물감을 덧입으며 개별적인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진형의 작업은 대부분 구상적인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는 명확한 서사를 통해 그것을 전달하기보다는 모호하고 생경한 형태로, 회화의 물성을 통해 드러내는 것을 택한다. 하나의 의미가 이미지를 단정 지어버리는 것을 막고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경험과 해석을 가져갈 수 있도록, 직접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기보다는 최대한 심상이 머금은 공기와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집된 이미지와 형태는 작가의 감각을 환기하는 촉매이고, 화면 위에 전사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추출되고 축적된 후 다듬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진형은 그림을 이해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는 장면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공기처럼 부유하던 감각을 회화적인 물성으로 (얇고 투명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깊은 회화로) 물질화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 이진형의 작업은 무엇을 그린다기보다는 어떻게 그리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사유는 형상을 빚어내듯 떠오른다. 흩어져있던 심상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정적이 선명해지는 순간을 찾을 때까지, 작가는 이미지를 다듬고 섬세한 선이나 자국을 더하며 신중하게 밸런스를 맞춰나간다. 일련의 작업들도 한정된 방법에 머무르지 않고 톤, 크기, 농도, 미디엄 등을 다양하게 실험하며 전개된다. 작가는 화면을 구성할 때 그림과 그림 사이의 연결성을 고려하면서 작업을 진행해나간다. 하지만 이는 장면으로써 그림을 잇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회화의 물성을 실험하고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표면들 사이에 접점이 생기고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농도와 기법을 연구하며 다른 갈래로 뻗어 나가는 것 같았던 그림들은 작가가 작업을 어떻게 전시할지, 어떻게 함께 놓을지를 염두에 두는 과정에서 다시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

 

이진형 회화의 물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지만, 주로 수채화처럼 표면 위에 잔잔하게 스며든 형태나 잔여물 없이 매끈하게 처리된 표면을 통해 드러난다. 작가는 브러시스트로크(brush-strokes)처럼 손에 의한 기법을 좀 더 다양하고 유연하게 구사하고자 지지체(painting supports)와 바닥칠(grounds and primer)의 연구를 겸행한다. 회화의 표면에는 습관과 스타일에 의해 이루어지는 형태 묘사, 물감의 농도, 브러시스트로크가 있고, 기교와는 별개로 그림의 토대가 되는 원단, 종이, 나무 등의 지지체, 그리고 안료를 고정시키기 위한 바닥칠로 이뤄져 있다. 작가의 연구는 캔버스 틀은 변형하거나 해체하기보다는, 기본 형태인 직사각형을 유지하되 원단과 바닥칠의 쓰임을 다양하게 하여 얇지만 깊이 있는 표면을 구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캔버스의 통일된 형태는 지지체의 쓰임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물을 부각시킨다.

작업이 전시장으로 들어올 때, 작가는 다시 한번 균형을 생각하게 된다. 공간은 새로운 화면이 되고 이미지들은 그 안에서 다시 배치된다. 형체도 없이 시야를 전복시킨 지하의 향처럼, 때로는 정립되지 않는 것이 더 명확할 때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것들도 한때는 미지의 존재였다. 작가는 대상의 형태를 빌리거나 맥락을 가진 이미지로써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생명력을 얻어 스스로 말을 건네기를 바란다고 했다. 『비원향』을 통해 회화를 은유가 아닌 독자적인 개체로 선보이고, 의미를 열어놓은 낯선 존재로써 다양한 해석이 공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회화와/의 환경

[비원향B1Hyang] 이진형 개인전 심층비평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0.3.25-4.24

 

안소연

미술비평가

 

“무제 Untitled”로 이름 붙여진 이진형의 회화는 대개 어떤 형상을 품고 있는 추상의 구조를 나타낸다. 그것이 간혹 이름 없는 무채색의 텅 빈 추상적 화면을 극단적으로 드러낼지라도, 어쩐지 회화의 화면 바깥을 한없이 상상하다 보면 어떤 익숙한 형상과 맞닿게 될지 모를 확신이 생긴다. 이처럼 회화의 바깥을 상상하려는 충동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진형이 회화 제작 과정에서 인식하는 일련의 선택적 조건들이 전시를 매개로 그의 회화에 대한 경험에서 일련의 (매체적 관습에 따른) 예정된 결과들로 인해 재인식되는 구조적인 맥락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애초에 작업의 과정에서 “회화의 조건”으로 그에 의해 선택된 개별적인 임의의 요소들이 회화의 평면으로 수렴되는 결과를 전시에서 마주했을 때, 흥미롭게도, 다시 임의의 회화적 조건에 대해 재인식하게 하는 끝없는 매체 특정적 구조의 되풀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이진형은 회화에 대한 매체 특정적 형식 논리를 스스로 재구축해 회화의 조건을 갱신하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때 강조되는 것은 회화의 평면이 촉발시키는 신체의 경험이며 공간적 지각(소통)이다.

   ⟪비원향B1Hyang⟫이라는 전시 제목이 드러내듯, 이진형은 전시 공간의 물리적 환경과 그것에 대한 신체적 감각을 크게 강조했다. 이는 그의 회화가 만들어지는 조건이자, 또 그의 (만들어진) 회화가 경험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그가 회화의 평면에 수렴시킨 그것의 바깥 환경에 대한 감각적 논리를 다시 회화의 환경으로 확장되는 전시 경험에서 반복하는 셈이다. 우선, 그가 만들어낸 회화의 평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나는 온통 “무제”인 그의 작업을 이 지면에 호명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그것이 공간에 놓인 관계를 말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데,) 전시 공간에 안정적으로 진입했을 때 한쪽 벽에 똑같은 크기(116.8x91cm)로 거의 바짝 붙은 채 짝 지어 걸린 두 점의 <Untitled>(2019)나 둘 사이의 선명한 다름-초록색과 회색이 각각 차지하고 있는 큰 바탕 면- 보다 미세한 닮음-마주한 모서리에 살짝 걸쳐 있는 추상적 패턴의 색감과 흐릿한 자국처럼 화면에 남겨진 붉은 색의 붓질- 때문에 공간에서의 연속된 흐름을 설계하는 또 다른 두 점의 <Untitled>(2020)과 그밖에 서로의 화면을 반영하고 스스로를 반사하듯 어떤 힘의 관계를 주고 받으며 벽과 바닥에 배치된 다수의 <Untitled>들(2019-2020)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이진형의 회화가 모두 무제인 까닭은, 그것이 단지 “그림”으로 보였으면 하는 그의 다부진 속내에 기인하는 것인데, 또한 그가 자신의 주변 환경에서 취득해 온 수많은 이미지들을 참조한 결과물로서의 추상적 회화가 이미지를 선택하여 처리해 온 자신의 감각적 경험과 동일한 과정으로 체험되기를 바라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미지의 선택과 처리에 있어서, 그는 “무제”의 함의처럼 그 대상에 깃든 현실의 서사를 비워내고 (서사 없이 서사를 구축할 요량으로) 회화의 재료와 기법으로 변환되는 감각의 논리를 극대화 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경험을 재고한다. 요컨대, 이진형은 회화의 제작 과정에서 익명의 신체가 경험하게 될 회화의 환경을 염두에 둔다. 이는 그가 어쩌면 회화의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미지의 선택과 처리의 과정 뿐 아니라 그것을 회화적으로 변환시킬 재료와 기법의 선택 및 처리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감각적 “지각”이 회화적 환경으로 구축될 때 익명의 신체들과 경험을 공유할 회화의 가능성을 찾고 있기 때문일 테다.

Untitled

월간미술 2021년 8월호

에디터스 픽 EDITOR'S PICS (p69)

 

https://monthlyart.com/portfolio-item/2021%eb%85%84-8%ec%9b%94-%ec%a0%9c439%ed%98%b8/

Untitled

월간미술 2020년 5월호

업앤커밍 아티스트 UP-AND-COMING ARTIST  (p130~131)

 

​염하연 기자 

https://monthlyart.com/portfolio-item/2020%eb%85%84-5%ec%9b%94-%ec%a0%9c424%ed%98%b8/